살아 있는 이야기/쉼표

백바지는 열 한 번째.

삼천포깨비 2008. 5. 27. 00:57

"여름은 다가오고... 일은 없고... 우찌 살것네?"

"형님은 많이 벌어 놨다 아입니꺼?"

"내가? 멀 마이 벌어? 대가리는 늙어가고 클났다."

"내일 또 비 온다 카나?"

"밤부터 오는가베?"

"자. 한 잔 해라. 백바지가 전에 얼마나 야물었다고? 참 멋도 있고...한 삼십년 전에 젊어 노니까 호리호리해가 지금 이 얼굴하고는 전혀 딴 판이제."

 

백바지는 자기 말인데도 딴청이다.

부어 놓은 술을 홀짝 마시더니 안주보다 물 김치가 더 맛있다고 했다.

"와? 백바진데예?"

나는 궁금하여 형님한테 물었다.

"백바지 전설 말하려면 실제 연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형님은 일어나더니 삼십년 전추억을 더듬기 시작했는지 느릿느릿 두어 걸음을 나가다 홱하고 뒤돌아섰다.

정면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양손은 주먹을 쥐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허리춤에 얹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세에서 흰 백바지를 상상해 보이소. 그 당시 최고 멋쟁이 패션 아입니까?"

하얀 백바지에 백구두...?

춤추는 제비도 아니니 어울리지 않을것 같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흰 빽바지였다.

어차피 하얀 바지였으니 백바지라고 부르려 한다.ㅎ

 

팔포에 길이 난 자리는 매립한 곳인데 그 옛날 그곳은 바다였단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동네 아줌마들의 일터이기도 했단다.

날만 새면 바닷가에서 고동을 줍고 게를 잡고 파래를 뜯었는데 놀면서도 단순한 놀이만은 아니었다.

잠시 들어 갔다 나와도 한 끼 땟거리로 충분하였고 남을 주기도하고 팔아서 돈을 만들 정도로 바다는 그렇게 동네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뻘 밭에서 입만 떠들게 놔두고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제법 가져 간 양동이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나 항상 잔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닿을까 멀찌감치서 있는대로 폼을 잡고 뻣뻣하게 서서 늘 손은 허리에 얹고는 구경만 하고 서 있던 빽바지가 뻐길만한 이유가 사라졌는지 동네 아이들 틈을 살피더란다.

마치 금지구역을 들어가는 것 처럼 눈치 못채게 조심조심 바다를 향해 걸어  물이 빠진 바닷가에 뾰족한 돌이 보이는 곳만 골라 발을 디디다 그만 맹수에 습격당하여 놀랜마냥 발라당 뒤로 자빠졌단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른 아이 할것없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것은 백바지가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나서 뒤로 돌아 선 순간이었다.

대낮에 바지에 오줌 싼 것 보다 더 깊숙히 축축하게 찐하게 젖어버린 엉덩이쪽의 뻘자국은 볼수록 배꼽잡고 웃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건으로 되어버렸다.

 

백바지는 웃었던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집으로 갔다.

그 말에 효력은 있었다.

더이상 아무도 웃지 않았다.

뼈도 못 추릴까 했던 걱정도 백바지가 바닷가에 나타나지 않고는 그대로 잊어버렸다.

웃었던 놈 중에 하나인 형님인데 본인도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갑작스레 꺼내었다.

"내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꺼?"

"니 그 뒤로 백바지 안 입고 다녔제? 하하"

그때부터 그만의 특권처럼 여겼던 백바지는 절대로 안 입었다는것 까지 아는 형님이다.

형님은 그날의 이야기가 계속 되자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뒤죽박죽 이야기 하였다.

 

"형님은 둘이 입도 못 먹고 산다고 엄살이요? 슬슬 하다가 때려 치우지. 놀러나 다니고 맛난거나 먹고 오래살라면 산이나 다니소."

"내? 첫번째도 깽깽거려서 바까떠니 두번째도 마찬가지라. 돈 안 벌어 오면 죽음 아이가?"

"형님은 겨우 두번째가꼬 그러싸요. 내는 열 한번짼데..."

"백바지 니 그때부터 기술 좋은 거 같더니 참말로 열한번째가?"
"내가 비싼 밥 먹고 머 할라고 거짓말 하요? 젊은 아 뎃고 사니까 안 참고 가뿌데요. 몇 달 산것도 있고 길게 사는건 지금 마누라가 육년째 아인교."

 

형님은 바다에 빠진 그 후 장가를 갔는지 아이가 몇인지는 소상히 모르고 지냈나보다.

하는 일만 대충 아는 정도이고 몇십년만에 만나 한 잔 하자고 약속 잡아 우리집에 온 모양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던 형님은 할 말을 잃고 술이나 어서 마시자고 했다.

백바지가 성질이 얼마나 지랄같은지 착한지 그의 어깨에 손가락만 튕겨도 날아오를듯한 문신의 수수께끼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