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야기/쥐들의 세상에서

[스크랩] 마음의 방향이...

삼천포깨비 2009. 10. 5. 12:39

누구보다 나는 세상 물정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내일 준다면 내일을 기다렸고 말일 준다면 말일을 기다리다 끝내 돈 한푼없이 추석을 보냈다.

지나고나서야 난 공상에 잠긴 백치처럼 멍한 나 자신에게 그 말을 믿는 바보가 어딧냐고 나무랬다.

이렇게 마음이 싸늘해지는 실망스러움인데 슬이아빠는 오죽할까 싶어 눈치만 살폈다.

화도 나고 비참해지는 감정을 무리하게 극복하려던 마음이 컸던지 말 수는 점점 줄었다.

밥 차리면 밥 먹고 해 지면 소주 한병 곁들였고 잘 시간엔 자러 들어간다.

사흘이 지나서 슬이아아빠 입을 뗏다.

하동이나 가자.

하동 어디?

최참판댁에 가든지...

네번을 갔는데 다섯번 채울려구?

거기 가기를 고대한건 아니지만 옆에서 듣던 슬비가 사흘 내리 온종일 집에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가는것일까...

무슨 마음에 나가자는 말을 했는지 몰라도 집에서 숨막히는것 보다 나으리라 믿어 본다.

슬비가 더 기분 좋아서 야단법석이다.

닭집에서 알바한다고 늦도록 일하고 온 슬이를 깨우고 밥 먹이고 나선 시간이 두시가 다 되었다.

햇살이 참 좋다.

증류되어 떨어지는 소주방울처럼 맑다.

더 좋은건 차 안에서 나는 방향제보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향긋한 냄새가 숨막히게 했다.

차를 따라오며 풍기는 가을 냄새가 헨젤과 그레텔이 숲속에서 만난 빵과 설탕으로 만든 집에 비기랴.

슬비는 에어컨 끄고 차문 열어놓고 가면 안되냐고 즈이 아빠를 조른다.

누가 사월을 잔인한 계절이라 했던가.

시월이 더 잔인하다.

행복에 빠지는 이 잔인함은 이 순간으로 만족하다.

마치 위험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분 좋은 나들이하고 좋은 꿈에 깨어나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월요일인데 사장한테 전화 해 봐라.

슬이아빠는 돈 입금 안 된것에 야코가 죽은게 분명하였다.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서로간에 추석을 잘 지냈냐는 인사는 무의미하지만  차분하게 목소리 가듬고 시작했다.

이번 월급날에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준다는 사람이 한달을 미루면 나는 그럴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미친여자가 옆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미쳐 날뛰고 독을 품어 봤자 당신은 참을성이 너무 없소...하고 나무랄것만 같았다.

살면서 또 다른 발견이지만 끊임없이 문제는 생길것이다.

이제와 점잖게 살려 애쓰다 보니 바보가 되어지는 기분.

 

무일푼인 거지도 시장기 면하면 행복하다.

당장에 쓸 돈이 안 들어와 돈 보따리 잃어버린듯 허탈감이지만 지나고나니 참을만 하다.

더러 힘들지만 힘들다는 생각할수록 힘들뿐이라는 걸 알았다.

슬이아빠 지난 한달 다른회사로 옮겨 열심히 일했고 시간만 따져도 벌써 신난다.

마음의 배고픔에서 마음의 행복감 찾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니 이제 많이 편하다.

 

출처 : 60년 쥐들의 세상
글쓴이 : 홍천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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