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깨비 2006. 2. 25. 23:32

슬비는 점심밥 실컷 먹고도 오백원 달라고 하더니 과자 한봉지 사 들고 들어온다.

먹을것만 있으면 싱글벙글이다.

기분좋아 신나는김에 때르릉~ 전화벨 소리를 듣자 마자 볼펜하고 메모지부터 찾기 시작했다.

"여보세요?"하는 동안에 슬비는 싸인펜과 필통 뚜껑을 열었다.

눈에 얼른 뜨이는것이 학원가방에 필통이었던가 보다.

 

시간만 있으면 필통뚜껑에 싸인펜으로 낙서하거나 그림그리는게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자기가 적을것이라고 불러 달라는 시늉에 전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큰 소리로 외웠다.

슬비는 그대로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벌리주공 몇동 몇호... 김밥 다섯줄, 족발 만원어치다.

 

따끈한 밥을 푸고 김밥을 싸는 동안 슬이아빤 족발을 새로 썰어 담았다.

준비 끝!

포장을 해서 비닐봉지에 담아 슬이아빠한테 건네주었다.

슬이아빠가 묻는다.

"어디? 몇동 몇호?"

"어? 적어놨는데... 슬비야~ 적어놓은것 어쨌노?"

"엄마가 기억하는 줄 알고 지웠다!"

"이런~ 먹는데 정신 팔려서 엉뚱한 짓만 골라서 하누?"

화가 난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슬비는 금새 눈물부터 질끔댄다.

슬이아빠는 대강 기억 더듬어 갔다오겠다며 봉지들고 나갔다.

정확한지 확인하려고 물어봤던것이다.

혹시 아니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비까지와서 구질구질대는 밖만 쳐다봤다.

슬비는 풀이죽어서 고개도 못들고 있으면서도 과자봉지는 안고 있다.

배달하고부터 두번째 일어난 사고(?)다.

한번은 잘못 듣고 적어서 헤메어 혼난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잘 적어놓고도 한순간 쓱싹 생각없이 지워버리는 바람에 헛탕치고 오는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한참만에 돌아온 슬이아빠가 만오천원을 돈통에 집어 넣는다.

쓰다 달다는 말도 없이 족발 손질한다고 고무장갑을 끼고 면도칼을 잡았다.

슬비도 마음이 놓였을까? 미안한 맘이 들었을까?

"엄마~ 내 나가 놀아도 되나?"

"비오는데 어딜가서 노노?"

"주미네 집에 가면 된다."

"알았다. 저녁시간에 맞춰서 온나."

"어~"

 

나는 아니 보는 척하면서 벽에 걸린 거울속에 나를 들여다 봤다.

내 인상이 우리 슬비 눈물 떨굴 정도로 무서웠을까 하고 인상도 써보고 웃어도 봤다.

얼씨구?

허연 머리카락에 다 늙어버린 저 여자는 누굴까...

아침에 샤워하고 이 닦으면서 거울 봤을 때 처진 볼살 혹여 치켜 올라갈까 한참을 두드려 주고 쓸어 올리고 만지도 또 만졌던 얼굴이었다.

이렇게나 볼품없이 늙어버렸다는 느낌에 가슴이 다 섬찟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클렌징으로 세수하고 팩도하고 크림도 잔뜩 발라서 잠부터 자야겠다고 맘먹었다.

 

어느 시골 빈 집같은 느낌의 시장통은 어제 오늘 부쩍 실감난다.

어제는 장날이라 그렇고 오늘은 비가와서 그런거면 낼은 다시 춥고 바람분다는데 이 일을 어쩔거나...

"할매 손이 그래 앏아가 더 살랬는데 안 살란다. 몇 마리만 더 넣어주이소."

"내가? 내 손이 얇다고 했나? 주라는대로 다 주면 내 머 먹고 살끼고?"

남자 손님은 목소리도 기운넘치더니 할머니한테 아예 협박이다.

끝까지 한 마리 더 빼앗다 시피 해서 서대 한마리 봉지에 담더니 더 사지 않고 그냥 갔다.

 

"자~ 이판 사판 공사판 ~ 바지 하나에 오천원~"

"양말 스무컬레에 만원~"

비가 크게도 아니고 살짝 내리니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팔던 바지장사 아저씨도 양말장사 아저씨도 한쪽 팔에 걸치고는 비닐로 덮었다.

철띠기할머니는 지나가는 바지장사아저씨 보고 젤로 큰것으로 달라고 주문했다.

금방 받은 만원을 주고 바지받아서 허리에 대어 보고 하는 사이 잔돈 오천원을 또 받았다.

"세상에서 돈이 젤 헐코 그 다음에 옷이 헐타."

"돈 보고 헐타는 말이 머예요?"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거제. 새로나온 오천원짜리가 돈 같지가 않고 상품권같다 아이가?"

"글게요. 오천원짜리 보는 사람마다 다 그런 말 하데요. 하두 사람들이 가짜 돈 만들어 쓰니까 몬하게 새로 만든건데. 은색나는 표딱지 있자나요? 그거는 아무도 위조 못한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돈통에 수북이 쌓이면 좋겠다~~"

 

돈 있는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겠나 하면서도 걱정이 분명 있다.

슬이아빠가 오늘 정답을 알려줬다.

"그 사람들은 죽는게 걱정아이가..."

그런데 왜 나는 사는게 걱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