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물 경주 같은 하루...
"아니? 지금이 몇신데 안 일어나고 있네? 학교에 안 가나?"
현관문을 열어 제치면서 누워서 자는 아이들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서야 시계를 쳐다 보니 여덟시 십분 전이다.
슬비 버스 탈 시간인데 옆에 슬비가 잠들었다 후다닥 일어나며 화장실로 뛰어간다.
저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잤나 보다.
"엄마! 안 깨우고 모했어? 나 어떻게 학교 가라구? 언니야~ 내가 먼저다."
화장실에서 짜증섞인 목소리와 아무도 못 들어 오게 문 잠그는 소리가 동시에 난다.
슬이는 먼저 책 가방을 챙겨 놓고는 교복을 입으면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는지 전화기를 들고 먼저 가라는 말을 하고 이내 끊고 슬비 나오길 기다렸다.
어서 나오길 기다리는 눈친데 물 소리는 그치지 않고 그냥 있자니 늦을 것 같은지 일어나 화장실 문 손잡이를 잡아 흔든다.
그래도 대꾸가 없자 발로 콩콩 차기 시작했다.
호랑이같은 엄마가 뒤에 딱 버티고 있으니 성질대로 쿵쾅거리지는 못하고 엄마 얼굴 쳐다 보더니 콩콩콩 다시 한번 찬다.
"알았다. 나가께."
대답을 하면서 슬비는 나오고 슬이가 들어갔다.
속으로 '나도 급한데..'하면서 벗어 놓은 옷가지들 들고 세탁기쪽으로 갔다.
평일에 이 시간까지 잤다는 건 말이 안되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슬이아빠한테 잔소리 들을까 부러 부지런을 더 떨어야 했다.
뒤쫒아 오면서 슬비가 발을 동동 구른다.
"엄마! 나 어떡해?"
"태워줄거니까 빨리 준비해라."
현관에 슬이아빠는 신발도 벗지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서 있는걸 그때서야 쳐다 보게 되었다.
"앗싸~ 언니야~ 빨리 준비해라. 아빠가 태워다 준데."
"아빠도 씻고 나가려면 바쁘니까 어서어서 가자."
"언니야~ 언니 양말 내가 신어도 돼나?"
"안됀다. 내는 머 신고 학교 가라꼬?"
"와? 또 시끄럽노? 양말은 하나 밖에 없나?"
"엉~!"
"엉~!"
슬이와 슬비가 동시에 대답한다.
"양말 통에 양말이 한짝이나 들어 있는데 양말이 하나 밖에 없다니 무슨 말이고?"
슬이는 슬비가 들고 있는 양말을 도로 뺏어서 신는다.
"나는 머 신으라고?"
슬비가 울상이 되어서 양말 찾아 신을 생각도 않고 내 얼굴을 쳐다 본다.
"그 양말 누구끼고?"
"언니꺼..."
"언니양말 와 니가 신을라 카노?"
"좋으니까~!"
슬비는 맹랑하게 언니거라는걸 알면서도 자기가 신고 싶으면 자기 맘대로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오늘 양말 두개 사라."
슬이아빠가 나를 향해서 명령을 했고 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내꺼?"
슬비는 자기 양말 사 주는 줄 알고 좋아하면서 묻는다.
"아니... 언니꺼!"
"나는... "
슬비가 또 입이 댓발 튀어 나온다.
"언니꺼 뺏어 신으면 되지..."
"아빠~아~~~~"
"햑교 안 가나? 빨리 가자!"
슬이 슬비 데리고 나간 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제 열두시 넘는걸 보고는 어서 불 끄고 누웠다.
그리곤 잠 들었는데 이상하게 한번도 깬 적 없이 잤다.
아침이 되어 여덟시 십분 전까지...
남들은 나이 들면서 잠도 없어진다는데 잠을 못 이기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고단한 하루이긴 하지만 이렇듯 세상 모르고 자지는 않는데 참 이상타.
슬이아빠가 공차러 가는 시간이면 자동 뽕으로 눈이 떠 진다.
깊은 수렁을 헤메듯 코 베어가도 모르듯 잤다니 말도 안된다며 어처구니 없어 했다.
애들에게도 미안하고 슬이아빠한테도 약간은 미안한 맘으로 걸레 잡고 앉아던 자리부터 닦으며 일어나 설겆이했다.
제일 하기 싫은 일이 설겆이다.
가게에서 물에 손담구다 들어오면 귀찮기도 하고 일이 지긋지긋해서인지도 모른다.
늦잠 잔 죄(?)로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한시간만에 일이 다 끝났다.
슬이아빠가 아이들 학교마다 태워주고 들어왔다.
"티비 고장 난거 어떡하까?"
"고쳐야쥐. 어떡하긴..."
"일단 전화 해 보고..."
서비스센타에 전화를 넣으니 열시 반쯤에 기사가 갈테니 괜찮으냐고 물었다.
좀더 일찍 올 수 없냐고 물으니 최대한 빨리 가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슬이아빠~ 열시 반에 온다는데?"
"고치고 오면 되겠네."
"알았어. 밥 차리까?"
"십분만 누웠다가..."
슬이아빠 나가고 컴을 켜고 로션 바르고 클릭하고 크림 바르고 로긴하고 블로그 들어와 잠깐 인사 하는 사이 기사가 몇동 몇호인지 확인 전화를 했다.
띵동 띵동 벨을 누른다.
문을 열어주고 뒤로 돌아서니 앗! 티비가 정상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니 하나도 안 아픈 기억이 났다.
생각하면서 웃음도 나오고 황당하기도 하고 하여간 할 말을 잃었다.
기사한테 '분명이 조금 전 까지만해도 화면이 전체가 빨간 색으로 맛이 갔다'고 전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고치려면 이만육천원인데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새빨간 거짓말 처럼 화면이 잘 나오는데 고칠 필요 없겠는걸요. 다시 고장 나면 오실 수 있어요?"
"아마 또 이럴 수 있으니까 그 때는 고치세요. 다른 건 손 볼게 없습니까?"
"네."
기사가 가고 티비를 껏다가 다시 켜 보았다.
신기하다.
내가 마술에 걸렸는지 티비가 마술에 걸렸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왜 이제사 멀쩡하게 나오는거냐구...
진작 알았으면 기사가 오고 가고 하는 번거로움도 미안한 맘도 들지 않았을것인데 말이다.
앉았던 자리에서 티비를 보다가 정신차려 시계보니 열시 반 버스 타기가 빡빡하다.
아니면 열한시 버스타도 늦게 나온다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옷 갈아입었다.
티비 끄고 거실 불끄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한바퀴 돌아 보고 현관문 잠그고 가스 차단기 내리고 계단으로 걸어 나왔다.
보면 볼 수록 여느 아파트보다 무척 깨끗한 느낌이 든다.
매일 복도에서나 현관에서 만나는 청소하는 아줌마의 명랑한 인사도 알뜰살뜰하게 청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내가 시장통에서 순대하고 족발하고 파는 아줌마라는 걸 알고 찾아오면 덤으로 많이 주리라 맘까지 먹었다. ㅎ
한번도 사러 오지 않은 걸 보면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여러가지 자잘한 생각을 하면서 시장에 들어섰다.
가게 들어 오자마자 돈 통부터 슬쩍 훔쳐 보고 실망스러웠다.
어머나? 지금까지 팔아 놓은게 만원리라니...
그런데 슬이아빠는 태연히 티비만 보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
김밥 한 개만 싸 달라고 했다.
열 댓개 싸 놓을 요량으로 밥을 양껏 푸고는 한 개 부터 말아서 손님을 보냈다.
나머지 다 싸서는 김밥 통에 넣고는 야채가게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상추파는 할머니가 김밥 한개만 달라고 한다.
다시 돌아서서 가게에 들어와 김밥을 한개 썰어 쟁반에 받쳐 갖다 드렸다.
옆에 있는 콩나물 아줌마가 김밥 한 개 달란다.
또 김밥 한 개를 썰고 오뎅 국물과 함께 쟁반에 받쳐 들고 갔다.
"단무지가 요즘 비싸나?"
김밥 한 개에 단무지 세개 얹었는데 마음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더 달라면 될 것을 말투가 사람 기분 상하게 만든다.
더 달라는 말이 없어 모른 척 하고 볼 일 보고 가게에 들어섰다.
앞에 철띠기할매가 맨 밥 한 공기 달라며 서 있다.
다들 점심 시켜 옹기종기 모여 먹고 있는 틈에 밥만 들고 가서 낄 모양이다.
아. 오늘 우째 장사가 어렵다.
마치 장애물 경주 하듯이 힘들다.
"어? 오늘 와 일찍 오네?"
슬비가 학교를 마치고 오는데 평소보다 빠른 시간이다.
"오늘 선생님들 체육대회 한다고...학원에 일찍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지..."하며 전화기를 든다.
"선생님~ 지금 가도 돼요? 네에~"
선생님이 오라고 하였는지 질문과 대답으로 통화는 끝났다.
"엄마~ 내 롤 케익 사가면 안돼?"
"모할라꼬?"
"선생님 주게. 어제도 어떤 엄마는 꽃도 갖고 오고 롤 케익 사오든데. 엄마~~ 응?"
"안돼! 학원비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라."
"딴 애들은 다 하는데 나만 안하자나."
"학원에서 눈치주면 바까삐!"
슬이아빠가 다 듣고 있다가 소리 질렀다.
"그런게 아니란 말야~"
슬비는 선생님 욕 먹일까봐 조심스럽게 눈치보면서 칭얼거렸다.
"나만 안 했으니까 해 주고 싶은데..."
"슬비야~ 그냥 가라. 다음에 형편 되거든 해라. 자. 뽀뽀~~"
나는 슬비 달래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입술을 오무리며 쭈욱 내밀었다.
"안해!"
그렇게 뾰루퉁하게 나서더니 학원에서 돌아 올 땐 다 잊어 버렸는지 웃는 얼굴이다.
"엄마~ 붕어빵..."
"그래. 오늘은 붕어빵으로 끝내는거다. 알았제?"
"엉~ 붕어빵 사 갖고 집에 가께."
"그래. 집에 가서 좀 치우고 피아노 치고..."
"알았어. 내가 다 한다. 언니는 맨날 나만 시키고 그러거덩?"
"우리 슬비 이뿌니까 이쁜만큼 이쁜 짓도 해야지...티비도 이제 잘 나오니깐 숙제 다 하고 봐라."
"티비 고쳤나?"
"아니? 지가 알아서 나오드라."
"엄마~ 가께..."
슬비는 그렇게 붕어빵 사 들고 버스비 사백십원 들고 가방메고 집에 올라갔다.
전화 벨 소리가 난다.
수화기를 드니 슬비 목소리다.
"금새 전화하나?"
"엄마~ 그게 아이고... 티비가 또 빨가타."
"....."
역시 장사가 잘 안 되었다.
안 되는 날 있으면 잘 되는 날도 있는거라고 위안하면서 가게 마쳤다.
집에 오니 엄마 왔다고 제일 반가워하며 슬비가 재잘재잘이다.
열시부터 자야 키가 큰다는 소리 듣고는 일찍 자려고 준비 중이라 했다.
"엄마 컴 잠깐만 하고 금방 자께."
"응. 엄마. 내 옆에서 자라."
"니 한테 또 얼마나 얻어 터질라꼬?"
나는 슬비한테 눈을 흘기면서 이불속에 들어가는것 까지 돌아 앉아 지켜 봤다.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이 시간을 덮고 있을까...
슬픈 생각들...
기쁜 생각들...
혼자 무한히 고민하는 시간들...
그래도 살며 부대끼며 싫증이 날 까닭은 없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