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야기/쉼표

그녀은 용감했다.

삼천포깨비 2006. 9. 30. 00:44

방송을 타고 찾아온 여러명 중에 한 여인이 있었다.

티비에서 보고 한걸음에 달려 와 보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왔단다.

조심스레 소주 한 병만 마셔도 되겠는지 묻더니 순대 한접시 썰어서 같이 달란다.

김밥 말고 있는 나를 앞에 앉히고는 원래부터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며 날 보고 순대 먹으라고 권하고는 소주 한잔 홀짝 비운다.

 

그러더니 용기가 났음일까...

조금후에 꺼낸다는 말이 재혼이냐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어리둥절하여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으니 날 안심시켜려 했는지 자기 입장부터 밝혔다.

충청도에서 잘 살다가 이혼하고 남해 촌 구석에 재혼하여 산지 몇년 안된다고 했다.

자신보다 몇살이나 어리고 총각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내 남편이 조금 어려 보인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금새 눈치 채고는 웃기부터 했다.

 

이 여인이 찾아 온 영문인즉...

여섯시 내고향을 보다 마침 반가웁게 책소개를 하면서 내가 나왔는데 자막에서 나오는 이름과 나이를 보고는 같은 동갑이라 더 반가웠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 나이를 보니 한참이나 어려서 자신과 빗대도 차이가 많이 나기도 했지만 남편이 동안이라 지레짐작으로 자기랑 같은 처지겠거니 하고 어서 만나 보고 싶었다는것이였다.

 

책도 좋아해서 책이라는 책은 다 보았을것이라며 작가이름이며 책 이름을 댄다.

박계영이가 어떻고 공선옥이가 어떻고 공지영은 안 좋고 이외수가 어쩌구저쩌구...

세상에 있는 책은 다 읽은것 같이 그녀의 입에서 마구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잠자코 들으면서 순대 몇개 집어 먹다가 웃으며 고개 끄덕이며 삼십여분이 지나갔다.

슬이아빠가 말던 김밥 싸라는 눈치를 주길래 자리에 일어나서 비닐장갑을 끼는데 오분만 하면서 자리에 앉힌다.

그러고 소주 한 병만 더 마시고 가겠노라며 맘대로 약속을 해 버린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일 손 놓고 앞에 앉아 이야기 꼬박 들어야 했다.

이 여인 블로그 들어왔다가 굉장히 못마땅할게 뻔하지만 사실은 사실대로...ㅎ

 

자기도 바쁘다고 했다.

시장에 매일 나오는게 아니고 바닷가에서 남편은 선장이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면 혼자 집에서만 지내다 남편이 들어와야 같이 시장을 보러 온단다.

필요한 것들 메모해서 나왔기때문에 시장 한바퀴 돌면 일은 다 끝난다며 메모지를 보여준다.

메모지에 제일 큰 글씨로 책이라고 써 있고 시장에서 길을 묻다라고 써 있다.

자기는 시장에 와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말하며 책부터 달라며 사인부탁한것이다.

김밥도 이만원어치나 싸 달라고 해 놓고는 날 붙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슬이아빠가 싸서 포장했다.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궁금해 했다.

난 별로 팔리지 않은것 같고 유명한 작가도 아니라 기대말라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래도 책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아서 이놈이 세상에 나왔는데 아무렇게나 괄세받고 있는게 아닌지 소중히 다루는지 세상에 나왔는지 조차 모르고 외면 당하는게 아닌지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한줄 한줄 써 내려갈 때의 피말림이니... 온 고통이 뭉개어 탄생하는게 책이라며 무척이나 걱정이다.

단 한마디 밖에 못했다.

"그런것이라면 지가 알아서 겨야지 제가 어쩌겠어요. 책으로 밥먹고 사는 입장도 아닌데요. 책도 팔자가 있는가봐여? 호호호~"

이런저런 이야기 오가며 거의 한시간쯤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보니 시장에 오기전에 남편에게 미리 날 만날것이라 언질을 하고는 한시간동안은 따로 볼일을 보기로 했다는것이다.

남편이 오니 더 이상은 긴 말은 없었지만 소주 두병에도 또렷한 말씨로 연락처 적어준대로 한번 자기 집에 다녀가기를 원했고 언제든지 연락하자고 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도 처음부터 베스트셀러가 된것도 아니다.

스무스하게 읽히고 읽던 책이 오늘날까지 백년이 넘도록 즐겨찾는 책이 되고 말았다.

두고두고 보아진다면 더 바랄게 뭐 있을까마는...

 

며칠이 지난 이야기인데 그녀가 내 책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가져주는것에 감사함과 잊혀지지 않는 부분이 생겨 글로 옮겼다.

나는 시장통 이야기를 쓰면서 크게 고뇌하지 않았고 늘 즐거웠고 일진이 좋지 않아 부아를 돋구는 손님이 있어 글을 써도 다 쓰고 나면 울화통은 헌신짝 버리듯 시원하고 유쾌하였다.

그랬는데 요즘 카페 들락거리면서 오래전에 글쓰기하면서 먹먹함을 표현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때는 2003년 7월 12일

빗속인지 물속인지 분간이 안되는 밤이야...
비는 지금까지도 계속 내리고 있단다.
언제부턴지 세어지지 않는데 티비에서 하는 소리 들으니까
한 열이틀쯤이나 된다고 하네.
정말이지 징하게 내린 비야.

비 오는 하루 이틀은 너무 좋아서...
들떠서 밤 꼬박 새우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인데
이젠 날마다 쌓인 그리움 들고 다니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
늘 추상으로 걸어 놓고 있는 그리움의 그림이지만
다시 내 안에 단단이 비끌어 매어 놓으려니
도저히 두 손으로는 잡히지 않을 만큼 커져 버린거 있지.

오늘 할 말이나 쓸 글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부담스럽기는 하는데..
비와...시간과...나의 인내로 기 싸움 하면서
최소한 몇줄은 썼다는데 대해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어.
여백을 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써야겠다고 맘 먹고 있을 때
제대로 써 지지 않을 때는
아마도 똥 쌀 때 용을 쓰는 것 보다도 더 힘이 들어가는 걸
글을 쓰는 사람에겐 몇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글 한 줄 가지고도 몇시간을 버티며 매달릴 때
차라리 책을 뒤져서라도 베끼든지 시인의 흉내내고 싶어지고
그래서 우아하게 으시댈까 싶으지만
한 토막 두 토막..다섯 토막이 되어도
온전히 내 몸뚱아리로 동강이 내어 보려는 의지로
이 아까운 시간 허비하며 있는거 보이니?

비는 어둠에 녹아서 보이지 않건만
어찌하여 이 홍천땍 마음은
이 비에 비끼지 못하고 따라 녹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