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가 넘어서야 티비를 껐다.
스트레스때문인지 종일 한 쪽 눈이 쑤시면서 앞이 보이지 않아 겁이 났다.
책보는것도 컴을 하는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는 티비를 많이 본다.
쿡하는게 편하고 재미있지만 나를 돌처럼 굳어지게 하는 단점도 있다.
자리에만 누우면 뒤척이게 된다.
마치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었고 그걸 알았어도 어쩔 도리없다는것에 우울이 잠자리까지 스며들었다.
그제 밤은 밤새 비때문에 사람 잡더니 어제는 친구의 글이 한 뜻이 되어 동생들이 언니는 개새끼~~~라고 부르는거 같았다.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야 죽어도 잊지 못하는거지만 순간 서운 할 때의 감정 때문에 죽을 때 까지 잊지 않겠노라며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웠다.
왜 오십인 이 나이에 내 맘대로 할 수없는지에 더 화가 났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 들을 솔직히 입 밖에 내서 말할 필요 없다고 느끼고 내내 참느라 더 속을 끓이었다.
엄마는 아빠 신경쓰지 말고 니 맘대로 하지... 하면서 내 눈치를 봤지만 그 당시엔 오히려 더 약을 바짝 올리는게 동생들이었다.
아버지 성질을 더 잘 꿰뚫고 있는 제부는 달래기는 커녕 답지 않게 아부를 하는건지 대게 속살을 발라서 입에 넣어 주면서 나와는 눈 마주치기조차 피하는걸 느꼈다.
동생도 덩달아 아버지 이거 잡셔 보세요 하면서 게딱지에 밥을 비벼 상머리에 내 미는것이다.
마침 엄마 생일이었고 저녁 생일 상에 나는 불청객처럼 어줍잖게 자리 잡았다.
입이 미어지라 밥을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
눈물이 뚝 떨어지는데 이건 거지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 콧물과 함께 입에 들어간 밥을 삼켰다.
강원도로 날 불렀던 동생도 아뭇소리 못하고 밥을 먹다가 아버지한테 되레 더 크게 혼구멍 나고 있었다.
그것도 나 때문이라 생각하니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강원도 안 오면 되지 않냐고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로 가도 집에 내려 올 차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들은 소리 또 듣고 앉아 있기는 더욱 괴로울거 같았다.
이제 됐어요. 안 오면 되잖아요.
아빤 뒷주머니에서 뺀 지갑에서 십만원을 던진다.
엄마가 집어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 거지야?
도로 돈을 집어 던졌고 그냥 집을 나왔다.
어둠속에 비는 처량하게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생이별을 해도 비는 그렇게 처량하게 느끼지 않았으리라.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빗속에서 눈물까지 철철 흘리면서 버스에 탔고 서울에 도착하도록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상봉터미널에서 집에 오려면 버스가 끊겼으면 서울역에서 어디든 기차를 타려 맘먹었다.
대부분 전철을 이용한다지만 뭘 알아야 전철을 타지 싶어 택시를 잡았다.
서울 사람 눈 떠도 코 베어 간다드라. 택시 함부로 탔다간 어디로 끌려 갈지 모른다...
엄마는 삼십년 전에도 하던 소리를 아직도 하는 소리다.
갑자기 엄마의 모습 머릿속에 떠 올렸다.
택시 기사부터 물끄러미 쳐다 봤다.
인상 별로 나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경계심 없이 탔다.
남부터미널로 가자고 해놓고 차창밖의 야경에 예나 지금이나 비교해 보면서 빠르게 스치는 풍경이지만 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정말 별 다른건 없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휘황찬란한 빛들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돈이야 지불하는거지만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남부터미널에 왔고 심야버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기진맥진해 버린 나는 외로운 기분으로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보았다.
나와 아빠 사이에 무엇이 훼방을 놓았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생은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면 대대장으로 있는 동안에 크던 작던 도움이 될 것이고 또 한 동생도 자동차 딜러를 하는 바람에 도움이 될거라고 했다.
거기다 고향이고 부모님 그늘이 또한 도움이 될거라 믿었던것이다.
셋째 동생이 언니 무조건 와 봐... 하면서 놓치면 안된다고 나중엔 후회하지 말라며 전화를 하고 또 전화를 하는 통에 올라갔던 것이다.
엄마가 하는 말이 셋째 때문에 가게를 보러 갔다가 괜찮아서 아빠 호주머니에 이천만 있었어도 당장 계약금 걸었을것이라고 했었다.
외진곳에 있어서 좀 무섭지 않겠냐며 한번 올라 와 직접 보라는 이야기까지 했었다.
강원도 다녀 간지 채 일주일 되지 않아서 경비도 경비지만 장사하는 사람이 가게 문 닫고 나서기 쉽지 않았다.
셋째는 이사할 생각하고 일단 보고만 가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괜찮은 물건이길래 싶어 호기심과 더불어 희망의 날개 펴고 날아가듯 그렇게 서둘러 강원도로 갔었던것이다.
길치라 익숙치 않았지만 동생이 일러준대로 그곳을 찾았고 산자락에 터 잡고 있는 가든은 강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고 개울치고는 약간 크다.
홍수에 물이 불어 나면 넘칠것 같은 작은 다리가 있고 아담하고 예쁘다.
숨김없이 대답한다면 맘에 들었다. 동생 말대로.
장사를 안 해도 평소 살고 싶었던 곳이라 여기지니 집세가 얼마라는 계산은 제외해버리고 내 맘대로 상상을 뒤섞어보았다.
때때로 함박눈이 내리는 날의 풍경 바라보면 난 창가에 서성이며 바라볼것이다.
꽃을 가꾸는 취미는 내게 맞지 않지만 난 꽃들이 만발한 주변을 그렸다.
친구들이 좋아라 뛰어 오고 얼싸 안고 기타치며 한바탕 엉망진창이 되도록 마시고 부르고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시장통에서 장사할 적에 친구 여럿이 찾아 왔다.
한 밤중에 테이블 놓고 친구들과 낭만에 대하여 다 함께 열창하는데 삐융삐융 경찰차가 다가 왔던 적이 있었다.
자는데 시끄럽게 군다며 누군가가 신고하였다는것이다.
눈 뜨면 바라보고 사는 이웃이지만 누가 옳은 일이 못되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 몸은 뿌리박힌 듯 얼빠진 듯이 상상을 한 것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온 나는 다시없는 아빠의 반응에 또다시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내가 집에서 잠자는게 맞는건지 강원도에 다녀 왔는지 꿈을 꾸는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잘못을 했으면 용서를 해달라고 할 일이지만 강원도로 이사를 오면 안된다는것에 참으로 이해불가였다.
원인이 무엇인지 정말 아빠 생각이 옳은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음속에 늘 생각했던것 중에는 부모님 나이 많아서 언젠가 근처에 살아야한다고 다짐했었다.
생각대로 운수가 좋아서 가게 되나 보다 했다.
다된 밥에 새삼 반대하는 의미가 어떤건지 오만가지가 거미줄 속에 엉켜버리고 말았다.
돈은 있느냐... 지금하고 있는 가게는 어떡하느냐... 애들은 어쩔거냐...
그러니까 고3인 슬이가 전학이 안되면 그 아일 어디에 맡길거냐데 대해 제일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다시 찾아낸 기억중에 아빠는 내가 막내를 귀찮게 하는 존재로 여기셨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맏이였던 나에게 부모 맞잡이로 생각하고 막내를 곁에 두려했다.
그렇게해서 막내는 이곳에서 결혼하여 살고있다.
남자쪽에서 나이 많은지라 워낙에 서둘렀고 외식이다 선물공세로 애쓴 결과 서로 알아볼 틈 없이 쉽사리 결혼해버렸다.
막내가 나이가 어린탓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으로 전화를 하여 사네 못사네하였고 언니들도 덩달아 부채질하면서 결혼이 잘못된거라 했다.
옆에 사는 나는 강원도에서 전화를 받고 아는 처지가 되었다.
가서 데리고 오라면 동생집에 달려갔다.
그러다 동생은 다시 자기네 아파트로 갔다.
아마도 막내 제부한테 미운털은 여기쯤에서 박히지 않았나 싶다.
강원도에서 전화 올 때 마다 동생은 강원도로 전화를 했고 울면서 못살겠다던가 남편이 어찌어찌했다던가 시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에 마치 보기나한것처럼 아빠는 나한테 일러주는것이다.
그리곤 또 데리고 오라는것이다.
내 동생이라 아무생각없이 가게를 좀 봐 달라고 부탁했다.
돌 막 지난 슬비가 링거를 맞게 되어 서너시간은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좀 봐달라고도 했다.
금새 강원도에서 전화가 왔다.
동생 귀찮게 하지 마라. 이제 신혼인데 니가 언닌데 하면서 기분나쁘게 생각지 말고 봐 주라며 달랬다.
순간 뭐라고 말 할수 없는 그런것들.....
남들과의 관계에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친 형제지간에 경계가 있다는것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때 신경이 마비되고 있었던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보다 잘 살고 있고 부모 사랑에도 질투를 일으킬 때 많았다.
나는 도저히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들 때때로 기억날 때 마다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너한테만큼은 손 안 벌린다고 맹세까지 했었다.
했지만 지난 달 친구가 약속한 날짜 지키지 않아서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한 오십만 입금 시켜...
난 통장 확인도 안했다.
친구는 다시 말일로 약속날짜 미뤘고 나는 그대로 동생한테 말일까진 주겠다는 말만했다.
친구는 끝내 약속 안 지키었다.
이럴수도 있는거구나하면서 절망감도 앞섰지만 동생문제부터 해결해야했다.
이번 일로 하여 나는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게 되었다.
어떻게하면 저런 의식적인 약속 번갈아 하게 되고 내 돈 내 맘대로 못 받고 드러운 기분에 휩싸여 친구라는 형식이나 예의마저 깨게 만드는지에 비감만 들었다.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동생에 대한 감정이 이만한 일로 줄어든건 아니다.
고마운건 무시할 수 없지만 일시적인 것이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내 생각은 여기까만 미치는것이다.
동생이면서도 막내이지만 지나칠정도로 조심스러워하했다.
그 동생에게 행여나 슬이를 떼놓고 강원도로 이사 와 버릴까봐 아빠는 노심초사하신게 분명하다.
슬이에 대해 그닥 인상이 좋은건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외갓집에 가면 홀대 하던 외할머니 생각난다.
외할머니는 나만 보면 즈그 애비 닮았다며 이뻐해 주지 않았다.
엄마 닮았으면 인물이라도 낫지...쯔쯔쯔
곰방대를 톡톡 두드리면서 비스듬이 고개를 젖히고는 한 눈 지긋이 감고는 나를 쳐다 봤다.
엄마랑 아빠랑 인물이 내 인생에 얼마나 좌우 되길래 외할머니는 그렇게 나를 대했을까.
지금 엄마가 우리 슬이한테 하는거 보면 외할머니 생각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미운짓이야 많이 했다.
애기때 잠 잘 시간에 그렇게나 울어대더니 조금 커서는 떼쓰는데도 일등이었다.
아예 땅바닥에 드러 누웠드랬다.
잠 안 자고 우는 슬이를 업고 밤을 새우면서도 엄마는 내 얼굴 쳐다 보면서 누구 닮아서 이러노?
순하디 순한 나 닮지 않아 오히려 속으론 반겼던 나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도 어울리지만 사고뭉치들과도 잘 어울리던 슬이는 흠이라면 공부를 못한다는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할머니한테나 할아버지한테 막내 이모집에 맡기면 안되는 존재로 취급된 것일까?
내가 봐선 슬이가 사고뭉치라는 증거를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얼굴이다.
할머니한테는 지 아빠를 닮아서 눈이 쪽 째졌다는 것에 제멋대로 구는 아이쯤으로 인정해 버렸다.
고개넘어 할머니한테 가면 인물 못났다고 하기는 커녕 미쓰코리아 왔다면서 자랑이 대단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피를 상통되는데서 존재를 찾으려 하는것일까?
카페 들어갔다가 내 시선을 붙잡는 글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자유로이 지껄여 봤다.
다들 모여서 언니는 개새끼~라고 욕이나 하지 않음 다행이다.
강원도에 자주 오라고 차까지 사줬다는걸 동생들이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파서... 엄마도 아프고 아빠도 아프다고 했다.
빤히 알면서 못 갔다.
나는 개새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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