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길을 묻다/시장통 이야기

디게 걸릴 뻔...

삼천포깨비 2006. 8. 28. 23:38
 

저녁 6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엊그제만해도 해가 중천이더니 벌써 6시무렵에 날이 지니 여름이 다 간 모양이다.

쏘대이모가 양산을 걷어서 가게로 디민다.

우리가게로는 해가 다 넘어가 양산이 필요없게 되자 부지런을 떠는 쏘대이모가 먼저 걷어 쥔것이다.

미안한 맘으로 양산을 받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해가 질라니까 잠이 올라칸다"

갑자기 철띠기할매가 애기가 잠자는 모양으로 두손을 모아 왼쪽 귀옆에 대더니 세운 무릎에 기대었다.

"그게 정상이다. 늙으면 해지는대로 잠이 오고 해 뜨는대로 잠 깨는기다. 안글라?"

종일 별 이야기거리 없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꾸는 하였지만 이내 조용해진다.

시장통을 차지하고 있는 침묵은 어스름때문인지 입다물고 있는 사람들 표정 화난것 처럼 보일뿐이다.

거기다 오늘은 시장통 장사가 너나 할것 없이 엉망이었다.

내일 장날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진찬이아지매만 신났다고 해야하나?
동신네가 포도 가져오면 받아 놓고 가려고 동신아빠 기다리기 몇시간째다.

늦게 도착할지 모르니 가게 있는 물건이라도 빼 가라는 연락에 동신네가 가게 있는 물건 빼주는것 같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손님없고 무턱대고 앉아 있으려니 온 몸이 뒤틀릴 정도다.

티비 보다 눈을 내리 깔고 무슨 생각인지 한참 깊어 있었는가보다.

"누가 다 집어 가도 모르겠네. 장사에 신경 안 쓰고 조는기가?"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전혀 아닌 척 하고 반갑게 일어나 소주병부터 냉장고에서 꺼냈다.

"슬이아빠 옆에 있는데 가게를 누가 집어가겠어요? 제가 자면 슬이아빠한테 소주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동생은 일하는데 제수씨는 편안히 앉아 조니까 내가 심통났지. ㅎㅎ"

"손님 오실건가예?"

"하모! 잔 하나 더 갖다 주고 족발 하나 주이소."

 

"쏘주 한잔 줄란교?"

약간 졸린 눈을 한 나이 많은 아저씨인데 줘야할지 말아야할지 걱정부터 될 정도로 위태롭다.

어디서 많이 드셨을건데 멀쩡하다는걸 확인시켜 줄 양으로 위풍도 당당하게 흔들흔들대더니 그만 한쪽발이 풀렸다.

다행히 코보아저씨가 잡아서 나무걸상에 앉혔다.

"어디서 많이 하셨는데 집에 가셔야겠네요."

"집에 안가! 내가 술 멋지게 살께. 코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는데 어디서 오셨소?"

"물 건너서 왔어요."

"물 건너서면 제주도요?"

"물 건너면 제주도만 있나? 일본도 있고 미국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첫 대면 인사가 코보아저씨의 큰 코 때문에 무척 친한 사이처럼 농으로 주고 받는다.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더니 권하기도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꼬부라진 혀로 하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하였다.

"내 오늘 기분도 그렇고 그래서 나왔는데 디게 걸렸네."

코보아저씨는 한시도 쉬지 않고 주절대는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하더니 다시 할아버지를 쳐다 본다.

 

"처녀도 애 밸 수 있다. 농촌에는 국회의원 못지 않는 사람 많다. 내가 농촌 살지마는 육군본부 있을 때는 총도 잘 쐈다. 내 나이 육십여섯인데 동생같은데 한 잔 사께. 술 한 병만 주소. 아줌마~"

"동생이라뇨? 등빨이 내가 큰데 동생이라뇨?"

"나이가 최고지 등빨이 문젠교?"

술이 취한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자 마자 뚱단지 같은 소리에 횡설수설하는 동안 코보아저씨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장단을 맞추며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코보아저씨한테 술 한병에 족발 한접시, 할아버지한테 술 한병하고 족발 한 접시를 내 놓았는데 술 잔만 몇번 비우고 채웠을 뿐 족발은 손도 대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제 말 좀 그만하이소. 족발 어서 드이소."

"내가 돈을 안주나? 가마이 있어. 인물은 아무치구만 와? 쌀쌀맞노? 여자는 자고로 부드러워야 여자지~"

"이 영감 껄떡재이네? 내 이런 사람 꿈은 안 꿨는데 엊저녁 꿈이 희안하드만 이런 사람 만날라꼬 그런갑다. 내 디게 걸렸다."

코보 아저씨는 한쪽 귀를 막으면서 눈썹을 찌뿌렸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는지 족발을 싸 달라고 하고는 돈을 지불하고 자리를 떳다.

 

곧 코보아저씨가 도깨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나타났다.

다짜고짜 돈 이야기 오고 가더니 앉은지 몇분도 되지 않았는데 일어나 가 버렸다.

돈이 없어서 못 주는거라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가는 것을 보니 간이 배밖에 나온것 같다.

코보아저씨는 그런다고 못 받아 낼 줄 아냐며 소주 두병과 족발값 치루고는 오늘은 그만하는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에 잠자코 있던 슬이아빠는 '장사 안 될 때는 취~권으로 들어갈려고 했는데 기회도 안 주고 가느냐며' 섭섭해 하면서도 잡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일찌감치 문 닫자고 하였지만 시계바늘은 열시를 가르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