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왠지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심란한 기분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수학여행 떠난 슬비한테 간간이 문자나 넣으면서 그러다 손에 집히는 책 들추다 더 멀리 던져놓았다.
비오는 날은 심심치 않게 배달 전화도 오고 푸짐히 싸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테이블에 앉아서 소주에 족발로 매상에 크게 보탬이 되는 사람도 있다.
오늘따라 아니다 싶더니 늦어서야 나이 많이 드신 아저씨 두분이 들어섰다.
만원짜리 족발에 소주를 주문하자 슬이아빠는 두분이서 오천원짜리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으며 소주잔부터 채웠다.
슬이아빠를 자리에 앉히고 술 한잔 권하며 '시장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을 보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무뚝뚝한 슬이아빠는 금새 부드러운 표정으로 건낸 술잔을 마다않고 받아 마셨다.
배달전화오면 운전해야하는데...
걱정스러운 맘이지만 분위기 봐서는 이해해야 할것만 같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술이 점점 취해지는지 군대이야기로 가더니 월남으로 날라서' 북한까지 올라간다.
'월남 청룡부대에 근무했다'며 슬이아빠한테 '어디 근무했냐는 질문에 7공수 이야기가 나오고 월남 스키부대가 나왔다.
월남에서 청룡부대출신이 뤌남 스키부대가 정말 있었는지 묻는데 슬이아빠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만난 사람중에 월남스키부대 출신 많든데요..."
마칠 시간은 다 되어갈 쯤에 한다는 소리가 '오만원까지 마실테니 외상을 하자'는것이다.
슬이아빠가 펄쩍 뛰었다.
'다 마셔도 만원인데 오만원 마실라해도 이 장소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오만원은 안 나온다'고 했다.
'담배 두갑만 사달라'는 말에 얼른 뛰어가 사다 드렸다.
찜찜한 생각은 들었어도 육십이 넘은 양반이 그것도 첨으로 가게에 왔담서 외상을 하려나...싶었다.
드디어 술이 간을 크게 만든것인지 외상을 하자는데 어이없어졌다.
이게 뭔 말인지...
돈 한푼도 없이 소주 두병에 족발에 담배 두갑까지 거저 먹고 갔다.
국가 유공자라 18일날 돈 나오니 그때 줄거란다.
슬이아빠는 이십여분을 합석해서 받아 마신 술잔이 여러잔이니 대차게 잘라 말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기가차서 말도 못하고 있는 내 눈치를 보더니 배째라는 식으로 막가는 상황을 어서 넘기고 싶었는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하면서 상을 치웠다.
헛장사도 헛장사지만 벼라별 손님 다 만났어도 오늘 또 처음 사연 하나 만드는 손님이다.
얼마전 알콜 중독자인 손님도 매너 하나만큼은 좋았는데 말이다.
다섯번째 입원해서 다섯번째 퇴원하는 날 가게에 온건 두번째였다.
그 전에 왔었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고 기억을 더듬으니 제대로 생각이 났다.
저녁무렵에 남자손님이 불쑥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것이다.
말없이 안쪽으로 들어섰을 땐 무슨일인가 싶어 놀란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그냥 빤히 쳐다 보는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오셨냐?'며 남자손님 얼굴을 살폈다.
'소주하고 족발을 달라'며 의자가 보였는지 그쪽으로 가더니 앉았다.
얼른 썰어 넣은 족발을 꺼내고 소주 한병 디밀었다.
'책을 보고 왔다'고 했다.
'열다섯번이나 읽었다'며 '너무 궁금하여 병원에 있는데 잠깐 나왔다'는 말과 함께 따라 놓은 술잔도 그대로 둔 채 입에 대지 않고 잠깐 앉았더니 계산하고 뛰어 나가는것이다.
한 보름쯤 지났을거 같다.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말과 함께 술이 한병이 두병되고 두병이 세병되니 말이 많아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알콜 중독으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책을 접하게 되었고 15번을 읽다보니 달달 외울정도였고 술이 다섯병이 되자 내 이름을 마구 불렀다.
그러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와중에 술값은 계산하며 다시 서글피 울었다.
결국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는데 한사람밖에 나타나지 않아 슬이아빠가 눕힌채 겨드랑을 잡고 질질 끌고갈 정도로 실신상태였다.
그때는 정말 술값도 포기해야할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오늘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엊그제 젊은 부부가 찾아와 순대 이천원어치 먹으며 하는 말이 '책을 팔아서 얼마나 벌었냐?'는 질문을 할 때와 같이 기분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재미롭지 못하 사연 만들어 꽤 오래 기억될것 같다.
그나마 옥신각신하지 않고 조용히 보냈으니 약속 지키든 말든 술값에 대한 미련도 이시간 이후 버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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