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야기/쉼표

꼴찌에게 박수를...

삼천포깨비 2008. 12. 27. 19:24

-엄마. 나 이번에 회장 선거 나와.

-니가?

난 더 이상 아무말 않고 태연한 척 하기 위해 슬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응. 선생님이 나가 보래. 옆반에 반장보고 나가라고 했는데 걔는 안 나간다고 했데. 실업계에서 회장 출마하면 부회장은 저절로 되는거라고 했어. 지금 부회장 언니가 그러는데 학자금은 면제고 대학을 가든 취직을 하는데도 가산점이 있어서 유리하다고 한번 해 보래.

슬이의 눈빛이 결코 엄마를 골려 먹이려고 장난 삼아하는 말 같진 않았다.

슬이가 모자라서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만우절처럼 엉뚱한 말로 놀래키는데는 늘 두 손 들어야 했다.

 

주변에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널려 있지만 우리 슬이가 삼여교 전교회장 출마까지 한다는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밝고 착하다는 말은 종종 듣는 편이다.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주변에 친구는 항상 말썽꾸러기였다.

제발 친구들 멀리하고 공부 좀 할 수 없겠냐고 해도 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다고 했다.

그러던 아이가 시험기간이라며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행복했다.

더욱 감동시킨것은 장학금 30만원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꼴찌에서 몇번째가 아니라 앞에서 몇번째는 자신있을 듯 했다.

성공했다.

늘 1등을 도맡아 하는 친구와 공부밖에 모르는 친구만 빼면 다 이길것 처럼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울고만 싶었던 마음이 기쁨으로 번졌다.

머리가 늦게 트이는 애들도 있다더니 슬이보고 하는 말 같았다.

기말고사에선 예상대로 좋은 성적(?)을 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은 100점짜리도 있다고 했다.

이렇듯 순식간에 변하는 슬이를 보니 회장출마해도 따로 둘러 댈 말을 찾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우선 참모들부터 가게에서 보자고 하였다.

친한 친구들은 하나도 안 보인다.

이번에 슬이가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회장이 되든 안 되든 친구들의 관계가 확실하게 매듭 지어 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선생님이 추천을하고 엄마가 바라는 바이지만 출마해서 친구들 앞에 나선다는 용기가 가상하다.

그리고 고맙다.

 

내일이면 단상에 올라가 선거 연설을 하고 투표하는 날이다.

그런데 슬이가 울고 있었다.

포기하겠다는 말과 함께 속상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였다.

-친구들이 뒤에서 쑥덕거려. 어떤 선생님은 실업계에서 출마해서 표가 안 나와도 부회장 되는걸 반대한다는 소리도 들려. 어차피 부회장 될건데 뭐하러 선거운동하냐면서 도와주지도 않고.

-그럼 너한테 잘 하라고 용기주는 친구는 없어?

-있어. 참모들이 잘해. 준비를 많이 안 해서 그래. 인문계 애들은 엄청 난리야. 그래도 참모들이 새벽에 나오고 치우고 많이 도와주는데.

-것봐. 그런 친구가 니 진짜 친구가 되는거야.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친구가 이번 기회에 친구로 만드는거야. 바보야. 선생님은 다 너 싫데?

-아니? 어떤 선생님은 잘하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어떤 선생님은 던킨도너츠도 주고 갔어.

-그런데 어떤 선생이 반대하는지 몰라도 그런 말 전하는 친구는 배가 아파서 그럴 수 있으니까 하는데까지는 최선 다 하는거야. 어차피 부회장은 된거니까 회장 돼도 부회장 한다고 해. 연설문은 엄마가 대충 써 줄께

-아냐. 내가 썻어.

 

선거하는 날 열두시 가까워서 슬이한테 문자를 넣었다.

마치는대로 결과는 나올것이고 나름 잘 했다는 문자가 맘 편하게 했다.

학교 분위기로 봐선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투표 결과가 궁금해진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면서 슬이한테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 마쳤어?

-마쳤어.

-왜 안 와?

-그냥...

-그냥이 어딧어. 도와준 친구들 뎃구 온나.

-친구들이 싫데.

-왜? 또?

-무조건 뎃구와. 고생 했으니 탕수육 시켜 줄테니까.

-알았어...

슬이 목소리에서 힘이 없다.

이게 무슨 일이라니....?

 

얼마 안 있어 슬이랑 친구들 넷이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슬비친구네 중국집에 탕수육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 나 부회장 안 할래.

-무슨 일 있는거야?

-아니. 표도 안 나오고. 선생님들이 무시하는거 같고... 아예 인사도 안 받아. 회장한테는 축하한다는 말도 해 주면서...

-누가?

-그런 선생이 있어. 대놓고 무시하잖아. 행동 똑바로 하라면서. 내가 그 선생한테 걸린적도 한번도 없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하니까 싫어. 실업계라고 차별이 엄청 심해. 근데 공부 잘 하는 애들한테는 엄청 잘한데. 인문계 애들도 공부 잘하는 축에 못 끼면 차라리 실업계나 갈껄... 하는데. 오늘 회장된 애가 오히려 나한테 미안해 하는거 보니까 내가 쪽 팔리잖어. 표가 너무 작게 나와서 할 말도 없어.

-도대체 얼마나 나왔길래?

-꼴찌.

들어보니...

회장 된 친구의 표에서 반에 반에 반이다.

이미 부회장으로 정해진 이상 표를 주지 않았다는 소리도 들렸다.

표가 너무 작아 문제가 된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왕지사 끝난 일이고 아무리 들러리로 출마를 했다고 해도 최선을 다 한 슬이한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평생 여고시절 제대로 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기회가 한 번 있지 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선생님의 못마땅한 눈치나 친구들 질투가 섞인 시련을 극복하는것도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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