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야기/쉼표

백바지의 아주 오래전 이야기 (경남작가회)

삼천포깨비 2013. 2. 20. 16:59

 

백 바지의 아주 오래전 이야기

 

                                                                                 유경희

 

-겨울은 다가 오고, 일은 없고, 우찌 살것네?

-형님은 많이 벌어 놨다 아입니꺼?

-내가? 멀 마이 벌어? 대가리는 늙어 가고 클났다.

-내일 또 비 온다 카나?

-밤부터 올 것 같은데예.

-자, 한 잔 해라. 비는 비고, 술은 술이고.

-네

초로의 중년 남자 둘이 마주한 네모 탁자 위에서 소주잔을 부딪 쳤다. 좀 엉성하기는 했지만 유리잔에서는 꽤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이 둘은 소주잔만 홀짝 비웠을 뿐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을 생각은 않고 소주병부터 잡는다. 한 남자는 초면이었고 한 남자는 내 집에 자주 오는 김씨 아저씨다. 오랜만에 왔으면서도 평소와는 다르게 우리 아이들이나 남편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술만 마신다. 김씨 아저씨는 좀체 말이 없어 보이는 인상이다. 알고 보면 말이 많은 편이었다. 처음으로 가게 오는 날부터 어디에 살며, 애가 몇이며, 남편이 뭘 하는지 물었다. 남편이 배달 갔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멋쩍게 인사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술 한 잔 권하며 앞으로 단골 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제는 남편이 안 보이면 어디로 배달 갔는지 궁금해 하며 자주 왔다. 하루는 여럿이 뭉쳐서 왔는데 인력사무실 사람들이라며 소개했다. 같이 온 사람들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마시다 보니 취했고 취하니 개로 변한 듯 싸웠다. 주먹이 왔다 갔다 하고 의자가 날아다니는 이 난동을 제지할 길이 없었다. 김씨 아저씨 덕분에 손님이 늘어서 고마웠는데 못된 짓을 예사로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딧냐면서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듯 냉랭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김씨 아저씨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몇 달을 볼 수 없었는데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백바지가 전에 얼마나 야물었다고? 참 멋도 있고, 한 삼십년 전에 젊어 노니까 호리호리해가 지금 이 얼굴하고는 전혀 딴 판이제. 쫌 잘 돼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이제 영 고향 온기가?

앞에 앉은 남자는 대꾸 하지 않고 소주잔을 들어 비웠다.

나는 그동안의 반가움과 궁금한 마음에 김씨 아저씨를 빤히 쳐다 봤다. 우리 애들이나 남편에 대해 일언반구도 비추지 않아 결국 내가 말을 걸었다.

-왜 백바진데요?

-아. 예. 백바지 전설 말하려면 실제 연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김씨 아저씨는 일어나더니 삼십년 전 추억을 더듬기 시작했는지 느릿느릿 두어 걸음을 나가다 홱하고 뒤돌아섰다.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양손은 주먹을 쥐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허리춤에 얹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 자세에서 흰 구두와 백바지를 상상해 보이소. 그 당시 최고 멋쟁이 패션 아입니까?

 하얀 구두에 백바지라......,

춤추는 제비보다 겁나게 무서운 얼굴인 조폭 스타일인데 바보천지 아닌 이상엔 상상이 가질 않았다.

 

예기인즉, 앞에 남자는 팔포에서 태어났고 팔포에서 자랐다. 팔포에 길이 난 자리는 매립한 곳이다. 그 옛날엔 바다였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동네 아줌마들의 일터이기도 했다. 날만 새면 바닷가에서 고동을 줍고 게를 잡고 파래를 뜯었다. 놀면서 단순한 놀이만은 아니었다. 잠시 들어 갔다 나와도 한끼 땟거리로 충분하였고 남을 주기도 했다. 팔아서 돈을 만들 정도로 바다는 그렇게 동네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뻘밭에서 입만 떠들게 놔두고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제법 가져 간 양동이에 채우고도 남았다. 한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대로 개폼 잡고 뻣뻣하게 서서 늘 손은 허리에 얹고는 구경만 하고 서 있는 사람이 백바지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잔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신발에 닿을까 구경만 했다. 혼자 뻐겨봤자 아무도 쳐다 봐 주지 않자 동네 아이들 틈을 살폈다. 마치 금지구역을 들어 가는 것 처럼 눈치 못 채게 조심조심 바다를 향해 걸었다. 물이 빠졌을 때라 바닷가에 뾰족이 튀어 나온 돌맹이만 골라 발을 디디다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맹수에 습격당하여 놀란 토끼 마냥 발라당 뒤로 자빠진 광경이 볼만했다. 바다 속을 뒤진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백바지가 뻘밭에 엉덩방아 찧고 일어나서 돌아 서는 순간 백바지에 묻은 뻘은 똥 싼 바지처럼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백바지는 외톨이었지만 동네아이들은 백바지가 무서웠다. 그러나 그날은 맘 놓고 웃었다. 백바지는 웃었던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집으로 가 버렸다. 그 말에 효력은 있었다. 더 이상 아무도 웃지 않았다. 뼈도 못 추릴까 했던 걱정도 백바지가 그 이후로 바닷가에 어슬렁거리지 않았고 점점 잊어버렸다.

 

-내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니 그 뒤로 백바지 안 입었제? 하하하.

왜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만의 특권처럼 여겼던 백바지는 절대 안 입었다는 것 까지 김씨 아저씨는 기억해냈다. 백바지보다 두어살 많아도 그 시절엔 꼼짝 못하고 눈치만 슬슬 보다 어린 시절 보냈다. 지금 같이 늙어 가는 마당이라 그런지 말끝마다 꼬박 형님이라고 불렀다. 김씨 아저씨는 형님 대우가 기분 좋은지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형님은 둘이 입도 못 먹고 산다고 엄살이요? 슬슬 하다가 때려 치우지. 놀러나 다니고 맛난거나 먹고 오래 살라면 산이나 다니소.

-내? 첫 번째도 깽깽거려서 바깠더니 두 번째도 마찬가지더라. 돈 안 벌어 오면 죽음 아이가?

-형님은 겨우 두 번째 가꼬 그러싸요? 내는 열 한번짼데요.

-백바지 니 그때부터 기술 좋은 거 같더니 참말로 열한번째가? 내는 이제 심도 없고 시마이할란다.

-아따. 내가 비싼 밥 먹고 머 할라고 거짓말 하요? 젊은 아 뎃고 사니까 안 참고 가뿌데요. 몇 달 산 것도 있고 길게 사는 건 지금 마누라가 십년 돼 가나? 이제 걸릴게 없는데 내가 딱 걸리네요.

-먼데?

-암..... 암이요. 암에 걸렸다 이겁니다.

나는 미친 놈 처럼 마구 마시는 김씨 아저씨나 백바지의 술잔만 바라 봤다.

어쩜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한 번 해 본 말이겠거니 하면서.

밖은 비가 슬프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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