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길을 묻다/시장통 이야기

동신네 불났다...

삼천포깨비 2005. 6. 11. 23:47

문을 열고 나오니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어제까지 보리가 누운 자리에 물이 반쯤 차고 커피 찌꺼기처럼 까만 흙덩이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식전부터 저렇게 소란을 피우며 바삐 서둘렀는지 모른다.

물이 찬 논 안에는 세 사람뿐인데 기계 덕분에 늙은 몸이 무능해 보이지 않는다.

진 흙탕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재주부리는게 아닌데 재미나게 보고 있었다.

입장료 없이는 보지 말라는건 아니지만 더 서서 구경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바삐 계단을 내려와 차를 타고 시장통으로 왔다.

 

토요일이라서 기대가 대단했다.

저번주에는 하루 꼬박 장사하고 돈통에 돈을 꺼낼 생각도 않고 집에 온적도 있었다.

다음날까지 장사한 돈이 하루 벌이보다 못한 그런 날도 있었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에 보충해 보자고 벼른것이다.

 

덥다...

여름다운 더위가 시장통을 꽉 채우고 내 목덜미까지 덮쳤다.

벌써 이렇게 더워서야 한 여름 견디기 수월치 않을것이다.

"하얀 모자가 복 만났다. 모두가 덥다고 냉커피만 찾지 노란 모자도 장사 안나오지...

 파란 모자도 안나오지...빨간 모자하고 하얀 모자하고 둘 뿐이네?"

쏘대이모가 하얀 모자한테 냉커피를 시켜 놓고 하는 말이다.

빨간 모자가 한 발 늦었다.

뒤 따라 오다가 모두 냉커피 빨대를 쭉쭉 빨고 있는걸 보고는 지나쳐서 한 길가 쪽까지 갔다.

구루마에 끌고 다니는 커피 장사가 제법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어떤 이는 일수를 십만원 넘게 찍는다는데 그거 다 찍고도 먹고 사니 나보다 나은 장사가 아닐까 하고 부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속 사정이야 다 아는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여간에 그렇다는 말을 난 믿었다.

나 같은 경우는 가게에 냉장고가 있고 커피를 사두고 먹으니 하얀 모자든 빨간 모자든 자주 말 붙일 일이 없다.

자연히 친할 기회마저 없으니 얼마나 파는지 사연이 어떤지 알 길은 전혀 없다는 거다.

 

"동신네 가게 불 붙었다!!"

누군가 소리치는 바람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동신네 가게 앞에 과일 사려는 사람이 여럿이 보였다.

혼자서 수박을 건네주고 돈 받고 참외 봉지에 담아서 또 건네고...

어떤 아줌마는 한 보따리 사서는 들고 갈 엄두도 못내고 있다.

동신네가 택시 타는데 까지 갖다 준다고 잠시 기다리라면서 수박 사려는 손님에게 이건 얼마고 저건 얼마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우리 남편이 냉장고 안을 아보다 더 열어삿코... 머... 무을게 엄나 카드만 이거 사오라 저거 사오라 안카나... 술을 끈어 논께 입이 궁금한지 사람을 딜딜 복아사서 나왔다. 오늘 과일만 오만원 어치다 아이가~"

"그래 신랑이 술을 완전이 끈었나?"

"어데예? 이틀 대씁니다."

그 아저씨 술을 얼마나 먹어서 술 끊은지 이틀도 안된 남편 위해 오만가지 과일 다 사다 바칠까...

 

그럭 저럭 저녁이 되었다.

아직 환한 낮빛인데 시계는 여덟시가 넘어 버렸다.

가게마다 전등이 켜지는걸 보니 어느새 들러붙은 어둠이 기척없이 덮쳤나보다.

기대만치 짭짤한 수입까지는 아니지만 기본은 넘겨서 다행스럽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슬이아빠가 시계를 쳐다보면서 말을 건넨다.

잠자코 서 있었다.

끝까지 손님이 없을 수도 있다.

다른데 신경쓰려해도 시선 둘 데가 없었다.

왼 손가락이 오른쪽 손바닥에 자꾸만 옮겨진다.

할 일이 없으면 꼭 오른쪽 손바닥에 콩알만한 굳은 살이 거슬려서 손톱으로 찝어어 뜯을려고 한다.

그렇게 버릇이 되어 손바닥 굳은 살을 긁고 또 긁었다.

굳은 살이 박힌 것 처럼 시장통에 박힌 게 싫다.

늘 이곳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결국 뜯어내지 못하는 굳은 살 처럼 시장통과 너무 친해져버렸다.

하필이면 왜 시장통이였을까...하면서도

먹고 사는데 보장되는 곳이라고 믿었던 그 매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아무나 아무래도 통과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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