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잠이 깨면 정확히 다섯시다.
눈만 뜬다.
일어 나고 싶지 않지만 다시 한 번 마음 다 잡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반동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잠과 싸워서 승리한 기분으로 거실 서랍장 두번째 서랍을 열어 팬티와 브래지어와 런닝을 챙겨 가방에 넣는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위 아래 색깔이 맞지 않을까 다시 확인하며 살그머니 현관문 열고 나온다.
어느새 이미 저만큼 물러났고 희끄무레 먼동이 트면서 와룡골짜기 쪽에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들린다.
용강탕까지 걸어 가면서 아파트 나서기 전에는 경비 아저씨가 빗자루와 집게를 들고 구부린 모습이 보인다.
내 보기엔 어둠을 쓸어 내고 있다.
저 쪽에서 아는 척 하며 다가 오는 한 사람이 내 앞에 섰을 때야 알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만다.
우리 아파트 부녀회 총무인데 야구르트와 우유를 배달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 신 새벽에 자주 만난다.
마주치고서야 눈이 똥그랗게 뜨고는 놀란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은 매일 한결같이 새벽부터 삶을 꾸리는 모습에서다.
술을 좋아 하고 가끔씩 늦은 시간까지 마셨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어찌 이렇게 거뜬히 일어 날 수 있는지 감탄이다.닥치는대로 알바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고, 적십자 봉사활동도 한다.
젊음인지 정신력인지 별걸 다 생각하며 발걸음 옮긴다.
파리바케뜨 빵집 근처에서 중년 부부가 등산복 차림으로 나란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와룡골짜기로 가는방향이다.
뒷모습을 보면서 부럽다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대신했다.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새벽 이 시간쯤 일어나 리어카 끌고 부두 시장가는 동신네 생각이 난다.
갑자기 동신네 떠 올리다가 어느새 중앙시장에서 장사하던 시절로 돌아 간다.
그 때는 새벽은 아니지만 아침 일찍 일어 나야 했다.
어린 아이들 씻겨서 머리를 일일이 매만져 새 옷 입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보내 놓고 아침을 먹었다.
그럴 때 남편은 늘 술에 젖어 일어 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피곤하다는 사람이 밤 늦도록 마셨고 귀가 시간이 빨라야 열두시지만 새벽이 다 되어야 들어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눈 붙이고 편안히 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밤새 기다리고 빨간 눈으로 울고 불고 하다가 가게 문 열었다.
사네 못 사네 하여도 남편은 내 말이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루도 못 가서 또 술 타령이었다.
가게 2층 4평짜리 골방에서 사년을 살았다.
네 식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록 좁아터진 방에서 수년을 견뎠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젖먹이를 눕혀 놓고 장사하는데 잠에 깬 슬비는 그대로 아래로 굴러서 가게로 떨어 진 적도 있다.
걸음마를 떼고 뛰어 다닐 때 쯤엔 오백원 손에 쥐어 쫒아 내기 바빴는데 놀이터는 한내천이었다.
거기는 풀숲이라 모기떼가 교묘히 숨어 있다가 아이에게로 달려 들었다.
뽀얀 살결이 빨갛게 물들다 싶이 했고 긁은 자국이 며칠 지나면 땅빛으로 변했다.
군데군데 성한 구석없이 모기 물린 자국이며 놀다가 멍든 자국이 내 가슴엔 더 시퍼런 멍이 자리잡았다.
밤낮없이 남편 때문에 아이때문에 안절부절하면서 용감하게 세월 맞서 살아 왔다.
돈은 벌어야 했고 모아야 했지만 남편의 외도와 술 때문에 모을 정도로 삶에 애착은 없었다.
그래도 남들은 억척스럽네 똑순이네 하면서 칭찬은 자자했다.
그렇게 고생해도 집세 모자라고 생활비 걱정할 때 늘 친정아버지 도움이 있었다.
시집 식구들마저 부러워 하던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는 지금 가진 거 없이 외톨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다.
남편이 며칠을 뒤져도 나오지 않은 것 처럼 돈은 없다.
누구 말대로 집 있고 핸드폰 다 가지고 있고 자가용 있으면 행복 아니냐며 위안 삼아 본다.
거기다 건강하다.
남편만 빼고는 다 건강하다.
2월부터 허리 삐끗했던 걸로 속 썩이더니 3월 20일 쯤 다시 자리 보존하고 눕는것이다.
안되겠다 싶어서 하동 오바홀 공사에 일자리 알아 보고 29일부터 일하던 중에 한달을 못 채우고 그만 두었다.
고성 조선소로 이불까지 싸가지고 간 지가 나흘 지났다.
두어번 통화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에 순간 치명적이다 못해 번개가 머리위를 치는 기분이었다.
나 보고 얼마나 힘든지 조선소에서 한 달만 일 해 보라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염두에 두고 어제는 삼천포 공고에 전화하여 문의를 했고 담주 수요일 저녁부터 용접 기술을 배우기로 되어 있다.
이걸 알면 속으로 마누라 돈 벌어 오게 생겼다고 좋아할까.
며칠 전에 큰 아이 슬이가 시험 친다고 서울 갔을 적에 하룻밤을 시동생 집에서 묵었다.
슬이보다 4살이나 작은 딸 하나는 카이에 들어 가 있고 숙모와 삼촌 둘이 적적한 차에 슬이는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대접 잘 받으며 이태원까지 갔다는 말에 인사 겸 카톡으로 안부 전하다가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자꾸 주저 앉으려 하는데 내가 말 하면 듣기 싫어 하니 한 번 형님한테 힘이 되는 전화 한 통화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답은 딱 한마디였다.
갱녕기 증상이니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뻘쭘했지만 이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남편은 듣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잔소리에 결심을 하고 조선소로 일하러 떠날 사람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극복하고 전력 다해 일해 주었으면 한다.
전처럼 연민과 걱정에 조바심만 내면서 불안했던 내 삶에서 벗어나 의연해 지고 싶다.
운동 후 목욕까지 끝내고 집으로 들어 오면 7시가 다 되어 간다.
가스불 부터 켜고 세탁기 앞으로 간다.
미리 씻어 놓은 쌀은 얌전히 밥솥 안에 들어 앉아 있다.
어제 먹던 된장 데워 먹으면 되니 아침은 간단히 해결한다.
김치 냉장고 위에 문화상품권 오천원짜리 석장과 상장이 보란듯이 놓여 있다.
슬비가 와룡문화제에서 탔다면서 전화로 자랑을 늘어 놓았지만 대상이 아닌게 불만인 엄마한테 내밀지 못했던걸 느낀다.
미대 가겠다는 아이의 기를 꺾어 놓을 수는 없지만 솔직히 말해 엄마로서는 자신없다.
난 한동안 자고 있는 슬비 얼굴을 바라보다 발전소로 출근했다.
사무실 들어 서자 마자 폰을 열었다.
제목없음으로 해서 문자 와서 들여다 보니 곱디 고운 진홍빛 연산홍이 한 무더기 찍힌 사진이다.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시간 낭비 안 시키고 보여주니 고마울뿐이다.
어제도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찍었다며 고운 꽃을 찍어 선물해 주었다.
이럴 때 마다 산 채로 천당에 온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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