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토요일 오후 5시 퇴근하여 집에 들어 오니 남편이 누운 채로 티비를 보고 있다.
놀란 눈으로 언제 왔냐고 하니 3시에 마치고 왔다는 것이다.
빨래거리부터 챙겨 세탁기에 넣으려 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숙소에서 다 해결하나 싶어 내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옷이며 다 빨아 널었냐고 물었다.
옷보따리며 이불보따리는 차 트렁크에 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터 궁금했다.
하도 전화가 급하여 하던 일도 때려 치우고 갔건만 전화한 사람은 서울에 가 버리고 없었다.
다시 내려 와서 하루도 안 되어 서울 사는 노모가 돌아 가시는 바람에 다시 서울에 갔고 혼자서 일을 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회사 사장은 도망을 갔다는 소리까지 들려서 보따리를 다시 싸야 했다나...
내 눈치가 보기 무서워서 집에 오지 않으려 했는데 갈 곳이 없다며 삐딱한 소리만 늘어 놓는다.
군 소리 않고 내 할 일만 하고는 일찌감치 잠자리 들고 새벽에 운동 갔다가 일욜이지만 출근했다.
무료한 시간 책을 펴고 있는데 남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무얼하며 지내는지 안부 물으면서 남편 전화 번호를 묻는다.
조금 후 남편을 만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동안에 조경 사업 하더니 지리산에 팬션 샀고 올 여름에 족발을 팔고 싶은데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퇴근 후 남편이 나에게 넌즈시 건네는 말이 여름에 그 친구 팬션에 가서 일 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
마음같아선 내가 니 노예쯤 되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지리산이라는 곳과 팬션에 조용한 시간속에 나만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일찌감치 저녁 밥 먹고 자리에 눕는다 하여도 열 한시 넘었다.
종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 을 보았던 탓인지 눈이 따끔거렸다.
남는 시간이 많아 눈을 많이 혹사 시키는 편이다.
발전소 오자 마자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 읽었고 공지영의 '도가니'도 하룻만에 읽은 적 있다.
오웰의 에세이집을 읽던 중이었는데 사무실 한 켠에 '개밥바라기 별'이 눈에 띈다.
읽었던 적이 있던가? 아마 읽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마구 읽었다.
새벽에 동쪽에 제일 반짝이는 별이 샛별인데 초저녁에 뜰 때는 개밥바라기 별이라고 한다고.
저녁밥 다 먹은 후 개도 밥 안 주나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개밥바라기 별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기억 하고자 인호... 정수...미아...하다가 잠이 들었다.
바람인지 빗소린지 요란히 창문을 두들겨서 깼다.
네시가 안 된 시간인데 멀쩡한 정신이라 곧바로 컴에 앉아 쥐방친구들에게 일일이 댓글 달아 준다.
다섯시가 되어서 미리 준비해 둔 목욕 가방 메고 나왔다.
금방 그친 비로 젖은 길은 흑암으로 깨끗하면서도 바람은 상당했다.
은도금한 듯한 하늘과 죌듯이 목에 감겨 오는 바람이 부드러웁다.
그런데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것 처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느꼈다.
하늘을 다시 한 번 쳐다 보고는 재빨리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에서 옷 갈아 입고 헬스장에 가서 런닝하고 물커피 한잔 마셨고 샤워 꼭지 틀어 놓고 간단히 씻고 집에 왔다.
얼른 밥솥 얹은 가스 불 켜 놓고 세탁기 빨래 꺼내서 널고 도시락 챙기며 자고 있는 슬이 깨운다.
슬비는 머리를 말리는지 안방에서 드라이기 소리만 요란하다.
목욕탕에는 물에 빠진 놈 건질 때 잡힌 머리카락만큼이나 온 사방에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을것이다.
딸 둘은 서로 니미랑 내미랑 하면서 절대 안 치우고 나갈게 뻔하다.
밥은 차렸지만 나 혼자 숟가락 들 수 없어 아이들을 불렀다.
티비를 보던 남편은 슬그머니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오늘은 일 하러 가는 게 아니고 신체검사 받으러 가기 때문에 일찍 서둘지 않아도 된다면서 밥 먹을 생각을 않더니 내 눈치가 보이는가 보다.
내일은 근로자의 날이라 쉬는 날이다.
그 다음 날 일하러 간다는 사람이 이불을 실은 채 신체 검사 받으러 갔다.
슬비도 학교 가 버렸고 설겆이 하고 나서 도시락 챙겨 슬이 손에 들렸다.
난 오늘 까만 정장 바지에 마이 입고 뾰족 구두 신고 출근하기 때문에 도시락 가방을 들기엔 곤란했다.
이렇게 속이 아픈 날은 잔뜩 멋을 내고 싶어진다.
매니큐어도 바꾼다.
까만정장과 어울리지 않게 보랏빛 색깔인데 난 향수냄새 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아. 인생살이 드럽게 힘들어도 이런식으로라도 자유롭고 싶다는 표현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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